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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6-2: 전한(前漢)원제 유석(BC75-BC49-BC33) <Q,끝>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2월25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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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65> 유향의 상소 : 교제矫制한 감연수와 장탕의 징벌 문제 (BC33)

    

비록 멋대로 조서를 고치기는 했지만 질지선우를 죽이고 큰 공을 세운 서역도호 감연수와 부교위 진탕에 대해 조정의 판단은 크게 두 갈래로 갈렸다. 대공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를 해야 한다는 석현 무리와 큰 공은 작은 과실을 초월한다는 이유로 크게 포상해야 한다는 반대세력 무리였다. 그 중심에 전 종정 유향이 있었다.   

유향의 상소문은 이렇게 되어있다. 

 

    ” 질지선우가 사신은 물론 군사 및 관리 수백 명을 죽여서 

      그 악명이 외국까지 퍼지면서 나라의 위상을 크게 훼손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단호하게 주살하려는 마음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감연수와 진탕이 천추의 공을 세워

      만세 안전의 기반을 쌓았으니 군신들은 공훈이 그보다 더 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감연수와 진탕을 주살해야 한다는 소리가 넘쳐나고 있는데

      대공을 논하는 자는 작은 허물을 따지지 않는 법이고 

      큰 그릇은 소소한 잘못에 구애받지 않는 것입니다. “

     

원제는 조서를 내려서 감연수와 진탕이 교서를 고친 것을 사면해 주고 공경에게 봉토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하게 하였다. 

석현과 광형은 이렇게 반박했다.

 

    ” 질지선우가 본래 나라를 잃고 떠돌아 다녔습니다.

      저 먼 외딴 곳을 훔쳐서 웅거했으니

      진짜 선우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원제는 정길에게 고사를 따져보게 하여 천호를 봉토로 주게 하였는데 석현과 광형은 계속해서 따지고 반대했다. 4월에 감연수를 의성후로 봉하고 진탕은 관내후로 삼았으며 식읍 각 삼백호와 금백근을 주었다. 감연수는 장수교위가 되었고 진탕은 사성교위로 임명되었다.

 

 

<66> 원제가 죽다 : 먼저 산양왕 康을 죽여야 한다는 사단(BC33)

 

평소 병이 많았던 효원제는 BC33년 5월 24일 미앙궁에서 죽었다. 43세였고 16년 간 재위했다. 황후 왕정궁에게서 난 태자 유오가 황제가 되었다. 이 사람이 효성제(BC33-BC7)다. 황제가 바뀌자 승상과 어사대부가 곧바로 석현의 죄목을 낱낱이 들어 올렸다. 석현 무리 뇌양과 진순도 마찬가지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는데 석현은 걱정과 근심으로 밥을 먹지 못하다가 돌아가는 길에서 죽었다.(BC32) 효성제가 들어서면서 황실은 황후 왕정군의 왕씨 일족의 전횡에 휩싸이게 된다. 이 왕씨의 일족 왕망 때문에 결국 전한은 멸망된다.(AD6)

 

사마광(司馬光)은 이렇게 평론했다.

 

    “인군의 덕이 밝지 못하면 신하가 충성을 바치려고 해도 어찌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경방의 충언이야 명백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효원제는 그것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시경>에 이렇게 말했다. 

          ‘얼굴을 맞대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귀를 잡아당겨 말했다. 

           손으로 잡아끌었을 뿐 아니라 

           사실을 보여주며 말하였다. 

           그대에게 가르치면서 거듭거듭 말 했지만 

           나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듣는다.’

이 말이 효원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순열(荀悅)은 이렇게 평론했다. 

   

      ”공자가 말하였다.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라. 

       정치는 올바름이라. 

       올바름이 위에서 쌓이면 만 가지 되는 아래 일도 절로 알차게 되는 법이다.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顔淵17)“

 

 

 

<67> 태자 유오가 즉위하고 큰외삼촌 왕봉王凤이 등장하다 (BC33) 

 

BC 33년 6월 태자가 즉위했다. 18세 였다. 황태후, 즉 선제의 부인 효선황후 왕씨는 태황태후가 되었고 원제의 비인 효원황후 왕씨는 황태후가 되었다. 전에 시중이었던 왕풍은 대사마 및 대장군 및 영상서령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제 왕씨가 득세하면서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킬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68> 밀려나 길에서 죽은 석현石显 (BC32) 

 

석현은 곧바로 밀려나 중이천석의 장신중태부로 좌천된다. 승상과 어사대부는 석현의 옛 잘못을 낱낱이 고해 바쳤고 그 당여 뇌량과 진순도 쫓겨났다. 석현은 처자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다가 걱정이 쌓여 병이 되어 길에서 죽었다. 석현과 무리를 지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직책에서 방출되었다. 오록충정은 현도태수로 나갔고 어사중승 이하는 안문교위로 밀려났다.   

사예교위 왕존이 이렇게 탄핵을 올렸다.

 

   ” 승상 광형과 어사대부 왕담은 

     석현무리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상벌을 마음대로 주물러 해내의 우환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도

     그 때 그 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주청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첨하며 굽은 것을 좇는 것 阿谀曲从이고

     밑에 붙어서 위를 기망하는 것 附下罔上이며

     사악함을 품고서 나라를 혼미하게 하는 것 怀邪迷国입니다.    

     대신으로써 국가 정치를 맡는 대의에 맞지도 않고 부도한 것입니다.

     사면령이 있기 전의 일이나  

     사면 이후에도 광형과 왕담이 석현을 탄핵하지 않고

     스스로 불충한 것을 자백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제가 비뚠 인재를 등용하게 하는 것을 부추긴 것이니

     백관이 (광형을)두려워하는 것이 주상보다 더하다는 망언까지 나왔습니다.

     군주를 비참하게 하면서 신하를 높이는 것이니 

     칭찬할 것이 아니며 대신의 체모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광형은 이 말을 듣고 심히 비참해져서 즉시 관을 벗고 사죄하면서 승상과 후의 인수를 바쳤다. 성제가 즉위한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왕존을 좌천시켜 고릉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왕존의 말이 옳았다고 판단했다.  

 

광형은 말이 없었지만 스스로 불안했다. 매번 수재나 가뭄이 들면 책임을 느끼고 사직을 요청했다. 성제는 그럴 때마다 그를 위로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69> 왕태후의 여러 형제들이 전에 없이 모두 공을 얻어 후작이 되다.

 

왕후의 외삼촌 왕숭을 안성후가 되었다. 또 다른 삼촌 왕담, 왕상, 왕립, 왕근, 옹봉시도 관내후 작위를 주었다.  

 

간대부 양흥과 박사 사승이 황제를 대면하고 이렇게 말했다.

 

    ” 음의 기운이 양의 기운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고조의 약속에 따르면 공이 없으면 후작을 주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태후의 여러 형제들이 모두 공도 없이 후작을 받았는데

      외척으로 이런 일은 전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늘이 이상재변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때 대장군 왕봉이 민망하여 사직하여 해골하겠다고 했다. 황제는 오히려 우대하는 조서를 내리고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70> 혼군 원제(BC75-BC33)

 

중국 전한(前漢)의 제11대 황제 유석은 선제(宣帝)의 장남으로 허평군(許平君)소생이다. BC 49년에 황제로 즉위하면서 현실주의자이며 동시에 중흥을 성공시켰다는 평을 받았던 아버지 선제(宣帝)와 달리 유교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태자 시절 스승이었던 소망지(蕭望之)등 유생을 많이 등용했지만, 아버지 시대 측근이었던 환관인 홍공(弘恭), 석현(石顯)이 정치를 거의 장악하였으며 특히 석현의 무리들인 환관에 의해 마음대로 결정되었다.게다가 재정을 낭비하면서 국가 재정이 쇠약해졌고 황후(皇后) 왕씨(王氏)가 득세하면서 왕망(王莽)이 나라를 찬탈하는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하였다.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원제는 중흥의 부왕 선제의 업적을 다 소진하여 결과적으로 외척세력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만든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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