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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29> 민족시란 무엇인가?- 박목월의 시를 중심으로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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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0월29일 1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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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가 마련한 이 자리가 ‘문협작품토론회’로 되어 있고 오늘 이 자리는 <박목월 선생의 문학을 재점검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를 살펴서 ‘그의 시에 대한 기존의 평가들을 살펴 본다’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 자리에서 박목월 선생의 시에 대해 평소 제가 지니고 있었고, 조금쯤은 제 소견과 다른 생각들에 대해 논의를 제기해 볼 생각입니다. 이 자리가 학술발표회가 아닌 ‘토론회’ 형식의 자리니까 번잡한 인용이나 각주 없이 자유롭게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몇 년 전 어느 문예지 특집에서 한국시문학사에서 과대평가된 시인과 과소평가된 시인을 설문통계를 통해 집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과소평가된 시인으로 박목월 선생을 지적한 시인들이 두드러지게 많음을 확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박목월 선생이 과소평가된 시인으로 지적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을 겁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는 거의 전부가 서정시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사력질」연작처럼 언어의 객관화가 두드러져 보여 실험성을 나타내는 시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편들이 서정시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서정시는 ‘대상과의 시적인 거리가 아주 짧은’것이 특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상과 시인과의 거리가 짧은 관계로 주관이 강하게 나타나게 마련이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특성을 지니게 마련이지요. 박목월 선생의 초기 시편들이 실려 있는 시집 『산도화』는 물론이고 『난. 기타』 『청담』 『경상도의 가랑잎』 『무순』도 그런 점에서 서정시의 특질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박목월 선생의 서정시편들은 또한 그의 천부적 언어능력에 의해 단단한 결집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의 초기 시편들의 경우 한국시가 도달할 수 있는 순수의 궁극을 보여줍니다. 정서와 의미, 그리고 그것들의 음성이 지니는 소리 결을 합일해낸 『청록집』과 『산도화』시편들의 모국어는 가히 일품입니다. 모국어를 아름답게 가꾸어서 그 속에 깃드는 정신과 정서를 고양된 모습으로 담아내는 일은 시인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소명일 것입니다. 

 

그런데, 박목월 선생의 초기시들이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이 악랄하게 강제 되던 때로부터 조선문학 암흑기로 불리는 해방 전까지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저는 남다른 감회로 받아들입니다. 언어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 속에 한 민족의 정서와 정신, 상상력 등 총체적 문화 그 자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모국어 표현에 그의 시적 역량을 모두 집중시키고 있는 듯이 보이는 해방 전 목월의 시는 침탈당한 모국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발로였겠습니다. 

 

 

박목월 선생은 『문장』에 실린 그의 추천완료 소감에서 ‘소리없이 돌아가는 영화 필름의 여백’으로 시대 인식을 나타내 보여준 바 있습니다. 대사가 끊긴 채 돌아가는 필름의 공백과 모든 음향이 소거되어버린 영상만 남은 시대 인식 속에서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강요된 침묵이며, 소리 없이 엄습해오는 공포입니다. 

 

그는 그런 ‘강요된 침묵’과 ‘엄습해오는 공포’를 극기해낼 수 있는 모국어의 ‘음성’을 극한까지 추구해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시 100년, 한국시사를 찬찬히 뜯어보아도 한국어의 소리 기능이 이 시기 박목월 선생의 시에서 만큼 탁월했던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국어의 음상은 물론, 그 통사적 운용의 묘미는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타 민족 지배 하에서 모국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던져졌던 때 박목월 선생이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의 운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특히, 모국어의 음성 기능을 극한까지 추구해 보여줌으로써 시어로서의 한국어는 운용 지평을 훨씬 넓혀주었다는 점은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민족시’로서의 박목월 선생의 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민족시’와 ‘민족주의 시’라는 용어의 변별성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시’란 민족 전체의 공통된 고유 정서를 아름다운 민족어로 표현한 시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족시에는 그 민족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가장 보편적인 고유 정서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고, 또한 그 민족의 고유정서를 능히 포용할 수 있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민족주의 시’는 말 그대로 ‘민족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쓴 시입니다. 국어사전은 ‘민족주의’를 민족의 통일. 독립. 발전을 자주적으로 꾀하려는 사상 및 운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민족주의 시는 민족으로서의 주체를 강화하고 외세로부터 자존을 확보하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시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대단히 험난한 사회적 변화의 시기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거센 욕구가 분출 되었고 민중 성향의 이념이 우리 사회를 뒤 덮었습니다. 어느 새 순수 서정시의 위상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어느새 ‘시’는 투쟁의 무기가 되어야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실제로 “시여 무기여”라는 제목의 시집도 있었습니다) 현실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박목월선생의 시처럼 순수 서정을 노래한 개인지향의 ‘민족시’는 비선호 목록으로 밀려나게 된 셈입니다. 어느새 강한 목적성을 띤, ‘민족주의 시’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민족주의 시’만이 ‘민족시’라는 억지 주장들이 전면을 차지하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념적, 목적적인 시(‘민족주의 시’)가 피치 못 할 어느 시대 상황의 투사체로 대두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시의 본령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편향된 시각의 논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 박목월 선생 같은 순수한 ‘민족시’가 좁은 자리로 물러난 셈입니다. 

 

이런 편향된 사회적 경향의 실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18종에 수록된 현대시를 수록 빈도에 따라 정리한 통계를 보면 김수영의 「풀」이 13회, 이육사의 「절정」이 10회, 이상의 「거울」이 9회,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8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7회 수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박목월 선생의 작품은 「불국사」  「가정」,「산도화」가 1회 씩만  실려 있을 만큼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인터넷http://kr.blog.yahoo.com/topia1004) 이런 현상은 정통 순수 서정을 아름다운 모국어로 노래한 박목월선생의 시가 이념이나 신념을 추구하거나, 실험성을 지닌 작품들에 비해 뒷전으로 밀려나 있음을 반증해 보여줍니다. 

 

차제에, 박목월 선생의 초기 시가 암담한 시대상을 외면했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먼저, 시가 ‘현실’을 수용하거나 비판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다음으로 그럼 ‘현실’이란 게 무엇이냐? 시가 ‘현실’을 수용하거나 비판한다고 할 때 “시의 현실 수용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가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은 주로 민중사관에 입각해 글을 쓰던 사람들, 그리고 군부 독재 비판에 앞장섰던 논객들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현실’은 무작위적으로 축적된 사건들의 집합입니다. 무질서한 혼란 그 자체인 셈이지요. 문학은 그 현실을 투시하고 선별하고 배열함으로써 뜻매김된 질서를 지향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뜻매김된 선연한 질서’를 발견해 제시해 줍니다. 카오스 상태의 ‘현실’ 속에서, 시인의 투시력이 살아 움직이고, 카오스의 현실 속에서 ‘선연한 질서’를 발견하게 될 때, 그 생동의 ‘선연한 질서’로 창조된 질서의 세계를 우리는 ‘문학적 현실’이라 부릅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에 ‘현실 외면’의 족쇄를 채우려는 논자들은 대개의 경우 이 ‘문학적 현실’이 아니라 카오스 자체로서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 특히 『청록집』의 시와 『산도화』의 일부 시는 형극의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뜨거운 모국애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시는 실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있어야 할 현실”을 노래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목월 선생의 초기 시편들은 “형극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있어야 할 현실”을 노래함으로써  ‘창조된 질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언산 굽이굽이 돌아 갔기로

산 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 듯 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 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우름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같다 

 

                    -「길처럼」 

 

송화가루 날리는

외단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신직이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윤사월」 

 

두 편 모두 시집 『청록집』에 수록된 것들입니다. 앞의 시 「길처럼」은 산 구비를 돌아가고 있는 ‘길’을 노래해 보여줍니다. ‘길’은 산굽이를 돌아 돌아서 뵈일 듯 말듯 이어지면서 산울림을 부르고, 어쩐지 어쩐지 ‘눈물’과 ‘울음’과 ‘그리움’으로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정제되고 정화되어져야할 심적 상태로서의 ‘길’ 따라가기는 아련하고도 막막한 것인 듯하지만 ‘실낱같은 길’을 마련함으로써 이 미망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적 비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윤사월」의 ‘눈 먼 처녀’는 인간세상으로부터도 유폐된 절망의 시적 화자입니다. 상황으로 보면 암담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산직이의 딸인 이 처녀는 눈이 멀었으며 외딴집에 홀로 존재하는 암담한 화자입니다. 송화가루가 날리고 꾀꼬리가 우는 유폐의 공간에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 먼’, ‘유폐된’ 상황 속에 던져진 절망의 화자도 그냥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유폐의 공간인 ‘외딴 집’ 밖에는 지금 한창 봄이 흐드러지고 있으며 소외와 절망의 사람은 문설주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절망은 머지않아 끝날 것이며 ‘화창한 봄볕 속’ 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전언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희망적 전언을 제시해보여주는 박목월 선생이 실제로 처해 있었던 현실과 현실 인식은 대단히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박목월 선생의 정신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2005년, 경주에 <동리. 목월문학관>이 개관하게 되었고 박목월 선생 자료, 특히 서지류 모두를 정리하고 목록을 만드는 일을 제가 맡아 하게 되었었습니다. 제가 지도하고 있던 대학원 학생 몇 명과 그 일을 진행하는 동안 낡은 노트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안 표지에 ‘忍冬亭日記’라고 적힌 이 노트는 1938년부터 1940년에 이르는 시기의 박목월 선생 일기였습니다. 1930년대 말의 박목월 선생은 심한 정신적 결핍과 혼란 속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원인일 수 있겠지만 그 자신이 겪게 되는 정신적 폐허감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에게 망각의 열쇠를 주어 내가 지닌 추억을 밑바닥까지 열어 제치고 날려 보낸다 해도, 이제 나로서는 새롭게 출발할 용기도 야심도 없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20세대에서 내 약속기(청춘기)는 지내갔다. 짧았다. 소년기에서 수면기로, 이내 노쇠기다. 단지 내가 청춘이라함은 생리적 기능뿐.”  

 

                   -박목월 ‘인동정 일기’(1938. 1. 1) 

 

지금은 한 시다. 이 우주에 나는 위태한 공간에 한발 내여디딘 채, 지금 그대로 스러지려 한다. 의지 없다. 

                   -박목월 ‘인동정 일기’(1938. 6. 21) 

 

1938년 일기에서 박목월 선생은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짧은 청춘기’를 지나쳐 버리고 ‘수면기’와 ‘노쇠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자각 속에서 자신을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짧게 지나쳐간 ‘청춘’마저도 단지 생리적인 것일 뿐이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뒤의 일기에서 박목월선생은 번민 속에 빠져있습니다. 1938년 5월 20일 결혼한 신혼의 그는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허무와 폐허 의식과의 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슬픔의 정서 속에서 시를 통한 자기 승화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처럼 처절한 것이었을 때 목월 선생은 희망적 비전의 시를 쓴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질곡의 시대에 그가 도달하고자 한 이상 세계가 『청록집』, 『산도화』을 통해 제시 되었다면 『난. 기타』, 『청담』에서는 난세의 현실 속에서 자아의 자리를 확립하려는 응전의 모습이 주종을 이룹니다.   

 

 

시를 쓰는

이 아래층에서는 아낙네들이

계를 모은다.

목이 마려워 물을 마시려 내려가는

층층대는 아홉칸

열에 하나가 부족한,

발바닥으로

지상에 하강한다. 

 

II 

 

열에 하나가 부족한,

발바닥으로 생활을 질주한다

달려도 달려도 열에

하나가 부족한 그것은

꼴인없는 백열경주. 

 

III 

 

열에 하나가 부족한

계단을 오르면

상층은

공기가 희박했다 

 

                   -「상하」 

 

위의 시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곳은 ‘상층’이고, ‘아래층’은 생활이 영위되는 일상의 공간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시를 쓰는 ‘상층’에서 목이 마려운 시인은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또한 시인이 생활의 공간으로 내려가기 위해 딪고 오르내려야할 계단은 늘 ‘열에 하나가 부족한 아홉 칸’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이런 결핍감 속에서 ‘시의 공간’과 ‘생활 공간’을 오르내려야 하는 힘들고 벅찬 일상을 살아가야하는 것으로 노래되고 있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꼴인 없는 백열경주’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며, 그가 다시 상층에 있는 ‘시의 공간’으로 복귀하고 나서도 ‘공기가 희박’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시기의 박목월의 시는 이전의 『청록집』이나 『산도화』시편들이 보여주던 정제된 형식, 계산된 운율들을 찾아볼 수 없다. 가령, 위에 인용된 시 「상하」의 운율 양상과 다음의 시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해진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신직이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윤사월」 

 

 

「윤사월」의 리듬은 매우 정제되어 있다. 4음보를 변형시킨 3음보 율격을 시현함으로써, 시적 정서에 역동성과 변화를 추구해 보여주었습니다. 제1연의 ‘외딴 봉오리’에서의 ‘외딴’이 단음으로 ‘봉오리’와 결합됨으로써 2음보처럼 보이는 ‘외딴 봉오리’가 1음보로 읽히도록 배려되고 있다. 그러므로 2음보인 ‘송화가루 날리는’과 ‘외딴 봉오리’의 1음보가 합쳐져서 제1연이 3음보로 읽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2연의 ‘꾀꼬리 울면’ 3연의 ‘눈먼 처녀사’ 4연의 ‘엿듣고 있다’가 1음보로 읽히면서 이 시의 기본 율격이 3음보로 파악되는 것입니다. 주지하는 대로 한국시의 3음보 율격은 서민풍의 활달함이 깃든 서정적 운율입니다. 대부분의 초기시는 이처럼 정제된 시어를 잘 배려된 리듬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정서를 구조화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인용된 시 「상하」에는 그런 리듬을 찾아볼 수 없다. 현실의 중압감을 여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실적인 묘사가 중심이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목월 선생은 1959년 이후 한양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타계할 때까지(1978. 3) 봉직하였습니다. 그동안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으며, 사회적으로도 지명인의 반열에 있었습니다. 예술원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기독교 문인협회 회장, 효동교회 장로,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울시 문화상, 예술원상, 국민훈장 모란장, 명예문학박사 학위(한양대학교)등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때(1973) 전문시지 『심상』을 창간 운영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고혈압 등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게 되었으며, 육신의 나이도 회갑을 전후하게 되었습니다. 이시기에 박목월은 『경상도의 가랑잎』(1968),『무순』(1976)등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들 시집에서 박목월은 자신의 근원을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 자신이 성찰해낸 그 근원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존재자로서의 자신을 노래해 보여주었습니다. 

 

이베요 아베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이베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세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베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베 소원 풀어드리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도 감응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만술아비의 축문」 

 

위의 시는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경상도 어느 집의 제삿날 모습이 노래되고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만술아비’와 망자인 ‘아베’의 대화형식을 통해 투박한 인정의 소중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삿날, 만술아비는 격식에 따른 ‘축문’ 대신 그가 일상에서 쓰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소금’에 ‘밥’이나 많이 먹고 가라 합니다. ‘간고등어’ 한 손 마련하지 못한 제사상이지요.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은 ‘윤사월 보릿고개’를 겪어본 망자도 익히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망령마저도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이 제사상 앞에서 감응하게 마련이고, 그런 감응의 마음이 ‘굵은 밤이슬’이 되에 세상을 적시는 것입니다. 

 

박목월은 고향인 경상도의 ‘가랑잎’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면서 그의 근원에 내재한 투박하고 왁살스럽지만 도탑기 이를 데 없는 인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노래해 보여준 ‘인정’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망자와 대화도 나눌 수 있는 진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박목월 시의 화자는 아예 경상토의 사투리로 말하는 경상도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줄이 한 가닥

어디서 어디쯤이랄 것도 없이

느리게 흔들리며

오늘의 수국색

밝음 속에서

왜랄 것도 없이

느리게 흔들리며

해와 달이 가는 길에

어디서 어디쯤이랄 것도 없이

줄이 한가닥

막막한 태허의 혼돈 속에서

처음으로 불러보는

당신의 이름

신이어

신이어

신이어

줄이 한가닥

느리게 흔들리며

목숨이랄 것도 없이

동에서 서 까지. 

 

                   -「무제」 

 

위의 시는 신의 존재와 마주하고 있는 존재자의 모습이 노래됩니다. 어디쯤이랄 것도 없는 무한량의 시공 속-그곳은 어떤 이승의 질서나 가치도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이다. 그래서 ‘어디쯤’이나 ‘왜’란 이승의 척도도 모두 소멸되고 없는 ‘막막한 태허의 혼돈’ 속입니다. 목월선생은 지금 이승에서 이룬 어떤 신분이나 가치도 모두 버리고 다만 느리게 흔들리는 한 가닥 ‘줄’을 바라보면서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겸허하게 자신을 통찰하면서 신 앞에 서 있는 존재자-그것이 만년의 목월이 찾아낸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는 우리민족의 고유정서를 아름다운 모국어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뛰어난 ‘민족시’의 모범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색한 평가를 받은 것은 서정시가 주관의 형식이라는 점, 이념과 목적 지향의 시들 속에서 그들이 만든 잘못된 평가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목월 선생의 시가 일제의 강압과 같은 억압의 상황을 외면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쓴 박목월 선생의 시가 보여주는 온화함과 부드러움은 서정시가 “있어야할 가상의 현실”을 노래하는 양식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시기의 시들이 모국어 말살의 위기 속에서 쓰여진 점은 주목되어야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국어는 그냥 기호가 아니라 정신과, 정서와 상상력을 담아내는 존재 그 자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나마 박목월 선생의 시를 살펴본 셈입니다만, 어느 시기에도 시인 자신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이라는 서정시의 본령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물과 현실을 수용하는 기본적인 형식을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박목월 선생은 “대개 5년 단위”로 변모된 시편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인이 하나의 ‘틀’을 이뤄내는 일은 지극히 어렵고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박목월 선생은 쉼 없이 자신이 이뤄낸 시의 틀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 보여주었습니다. 쉼 없는 탐구와 정진의 모습을 박목월 선생의 시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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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박목월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유품전이 열린 한양대학교 박물관 앞에서 (좌로부터) 박상천 한양대 교수,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박목월 선생 장남),  장윤익 동리목월 문학관장,이건청 한양대 명예 교수, 정민 한양대 교수가 박수를 치고 있다.

 

※ 이 글은 지난 2009년 10월에 개최된 한국문인협회 주최 ‘문협작품토론회’의 <박목월 시인 편>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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