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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64> 경제개혁이 시급하다 II. 농업은 국민생존의 기본이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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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3월24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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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I​I. 농잠은 국민 생존의 기본이다. : 농업정책

 

세종은 농업을 왕정의 최우선과제로 보았다. 세종의 농업우선 철학은 농업을 권장하는 교서 여러 곳에 잘 드러나고 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안다.

    농사는 먹고 입는 것의 근본이므로 정치의 최우선과제인 것이다.

    오로지 백성의 삶의 천명과 관계되는 일이라서 지극한 노력으로 종사

    해야 하는데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성의껏 지도인솔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백성들을 부지런히 힘써 농사를 지어 생생한 낙을 누리게 

    할 수 있겠는가.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農者 衣食之源 而王政之所先也 

    惟其關生民之大命 是以服天下之至勞 不有上之人誠心迪率 

    安能使民勤力趨本 以遂其生生之樂耶 : 세종 26년 윤7월 25일)”

 

이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세종은 국정방침의 제1조에서 농잠업은 백성의 생존의 기본이라(農桑衣食之本)고 한 것이다. 농업과 잠업은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 것이고 동시에 국방의 필수조건인 산업이었다. 따라서 농잠업에 충실하도록 정부의 관료들이 매진하는 것을 첫 번째 국정 방침으로 삼았던 것이다. 세종의 농업 진흥정책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먼저 농토 및 농업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를 단행했고 그 다음으로 농지를 확장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농사기술을 혁신하는데 힘을 쏟았다. 정보, 농지 및 기술의 세 가지를 농업혁신의 중추적 요소로 보았다.     

 

 

II.1 농업 실태조사가 시급하다.

 

정보를 가장 중요시하는 세종이 늘 그랬듯이 농업정책을 위한 첫 작업은  정확한 농업의 실태조사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대제학 변계량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옛날 노인들이 점차 없어지니 문적이 없으면 안 되겠다. 본국의 

     지리와 각 고을의 연혁을 찬술하여 볼 수 있도록 하라. 

     (故老漸稀 不可無文籍 本國地誌及州府郡縣 古今沿革 俾撰以觀

     : 세종 6년 11월 15일)” 

 

전국의 농사 지리 및 기술정보를 총괄하는 책을 찬술하라는 말이었다.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이 작업을 위해 전국의 3800여개 비보사찰과 관련한 정보가 보관되어 있는 충주사고의 사료를 춘추관으로 옮겨 왔다(세종 7년 6월 2일). 변계량이 주도하여 시작한 이 사업은 변계량이 죽게 되자(세종 12년 4월 4일) 맹사성이 이어 받았고 권진, 윤회, 신장 등의 도움으로 7년 2개월의 세월이 걸려 세종 14년 1월 19일 <팔도지리지>가 새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팔도지리지>는 전해지지 않으며 다만 이를 보완하여 단종 때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는 각 도와 주군현의 연혁과 명산, 대천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토지, 가옥 수, 인구, 주요 성씨, 특수작물, 약용작물, 주요 공물, 군사기지, 도로 및 역 등의 정보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II.2 농지를 확대하라.

 

[무영농 방임지의 해소] 

 

농업에 필요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개간되지 않고 버려진 땅을 적극적으로 개간하는 정책과 함께 해변 혹은 섬 지역에 제방을 쌓는 간척사업과 북방지역의 새로운 땅(신지,新地)을 확보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세종은 세종 2년 윤 1월과 11월에 경외 모든 관리들에게 정책 건의문을 올리라고 지시했는데 그 중 연안도호부사 정복주는 지방 부호들이 농지를 경작하지 않고 방임하는 실태를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즉, 지방 부호들이 관료들과 짜고 토지의 소유확인증을 발급받은 다음에 몇 년이고 땅을 묵혀두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그 땅을 개간하고자 하여도 소유권을 내세우며 경작을 허용치 않음으로써 국가생산량을 크게 위축시키는 폐단이 심했던 것이다. 부사 정복주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기가 개간하지 않는 땅은 남이라도 반드시 개간하도록 허락하도록 하고 이를 어긴 자는 엄격히 법으로 다스릴 것을 지시했다(세종 2년 11월 5일).  

       

[해안의 간척지 확대]

 

세종은 바다와 가까운 해변지역에 제방을 쌓고 경작지를 확장하는 간척사업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주관부서인 호조는 감사로 하여금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 수 있는 곳을 실사하도록 지시하고 그런 지역을 백성을 동원하여 논을 만들도록 하였다(세종 23년 1월 27일). 그리고 해안도서 지역의 경작을 촉진시키기 위해 과감한 감세 조치를 단행하였다. 거제도와 같은 외딴 도서에 이주하여 경작하는 자에게는 첫 해 세금을 면제하고 다음해에는 절반을 감면하되 삼년 째부터 정상적으로 과세하도록 하였다. 새로 경작지를 개척한 영농인에게는 첫 두해에 세금을 전부 감면하고 3년 차에는 절반을 감한 다음 4년 째부터 정상적으로 세금을 거두게 하였다(세종 5년 8월 2일).  

 

[새로운 땅(신지,新地) (앞의 제2장 세종의 국방정책, II 참조)]

 

새로운 땅에 대한 소문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마침 김방귀라는 사람의 증언을 들은 세종은 서둘러 이 새 땅을 찾아서 야인피해도 줄이면서 경작할 토지도 확보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허황한 이야기라고 무시할 사안이 아니었다. 산천형세를 잘 알고 또 여진 말도 아는 사람 5-6인을 선발하여 새 땅을 찾도록 보냈다. 세종은 새 땅을 필연코 찾을 생각이었다. 군사를 보내서라도 꼭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시끄럽게 떠든 소문이 오래 되었으니 그 땅이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신지를 찾는 자에게는 그 공에 따라 1등에서 3등 까지 포상금도 걸었다.

 

그러나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으로 듣던 새 땅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새 땅을 찾는 과정에서 그동안 탐색되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지역이 재발견되고 개발되었다. 예조좌랑 이선로가 탐색한 지역 중에 강계의 화헌 동쪽과 북청의 벌상 서쪽, 혜산의 압록 이남 그리고 함흥의 아란 북쪽지역이 동서가 15,6일 가야 하는 길이(노정)이고 남북의 길이는 10일 노정이면서 농사가 가능하고 요새처럼 되어 있어 방어도 쉬운 요충지라는 것이다. 이곳에 새로이 군현을 설치하자는 것이 이선로의 생각이었다. 세종은 이선로가 보고한 땅의 군읍 설치 가능성 여부를 찾아가 물어보라고 지시하여 검토한 끝에 세종 28년 5월 삼수군을 설치하였다.

 


II.3 농사기술의 개발과 확산


[농사직설<農事直說>]

 

농사는 지역과 토질과 곡식의 종류에 따라 경작하는 방법이 다 다르다. 따라서 이런 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다. 세종은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고을 내에 거주하는 나이 많은 노인들을 찾아가 농사의 경험을 상세히 청문하게 한 다음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정초와 변효문으로 하여금 이를 정리하여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는 책으로 만들게 하였다(세종 11년 5월 16일). 이 책을 여러 지방 고을에 배포하며 세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히 여기는 것은 정치의 근본이다.

    그래서 내가 매번 농사에 간절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務農重穀 王政之本 故予每惓惓於農事也 : 세종 12년 2월 14일)”


[수차(水車)개발]

 

세종 11년 12월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박서생이 일본 수차가 논에 물을 대는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해보였다. 세종은 기발한 안이라 생각했다.

 

   “본국 백성들이 제방의 이익만 알고 수차의 이익은 몰라서 가뭄을 만나 

    농사를 실패하니 참으로 가련하다.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수차를 놓을   

   수 있는 곳을 두루 살펴보아 이번 반포하는 수차 설계에 따라 제작하여    

  설치하고 수시로 감독하게 하며 인사평가 때마다 근만과 함께 평가하여

    출척(진퇴)에 증거로 삼도록 하라.    

    (本國人民 但知堤堰之利 不知水車灌漑之益 遇旱失農 誠可憐憫 

    其令各道監司 放可置水車之處 以今所頒水車 依樣製造 監司以時考察 

    每當殿最 幷錄勤慢 以憑黜陟 : 세종 12년 9월 27일)”  

 

세종은 박서생이 그려 보낸 모형에 따라 수차를 제작하여 실험하게 해 보았다. 그러나 시험 결과는 모두 실패했다는 보고 뿐이었다. 철원과 수원에서는 수차를 일일이 사람이 움직여야 하고 또 물도 다 새 버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세종은 수차가 매번 실패하는 이유는 관리들의 무관심 때문이라 생각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잘 작동하는데 우리나라만 안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국가의 일에 낮밤으로 마음을 다하는 자가 적으니 실로 탄식할 일   

   이다. 수차를 설치하는 것은 가뭄을 대비함인데 봉행하는 관리가 마음을   

   쓰지 않아 자갈모래 땅에 설치하여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심히 부당하다.

    위로 중국에서 아래로 일본까지 모두 수차의 이익을 보는데 어찌 유독   

   우리나라만 안 된다는 말인가. 

    (今於國家事 夙夜盡心者蓋寡 良可嘆也 水車之設 本以備旱 奉行官吏 

    皆不用心 排置沙石之地 以至無用 甚爲不當 上自中國 下至倭邦 皆受

    水車之利 豈於我國 獨不能行 : 세종 13년 5월 17일)” 

 

세종은 수차에 대해 깊은 매력을 느꼈다. 지방 관리들을 독려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세종은 좌대언으로 있는 김종서에게 의견을 물었다. 김종서는 과거 태종 때 우희열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해 포기한 것이며 박서생의 새 수차도 효과가 별로 없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세종은 믿기지 않았다.

 

   “단지 시행하는 사람이 마음을 쓰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요령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但行之者不用力 或未得其要耳 : 세종 15년 4월 8일)”  

 

김종서는 우리나라 토질이 나쁘고 샘물이 너무 깊이 있어서 백배의 공력을 들여도 물 대기가 쉽지 않으며 또 물을 대더라도 곧 땅속으로 스며드는 문제가 있다고 대꾸했다. 세종은 그것 또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사람이란 대개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법이다. 

    (大抵人情 憚於新作 : 세종 15년 4월 8일)”  

 

김종서가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세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필코 이루어 내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내가 이것에 마음을 깊이 두는 것은 빨리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이익을 보게 하자는 것이다. 내 반드시 성과를 얻고자 하니

    마땅히 이 일을 맡을 자를 선임하여 각 도에 나누어 파견하라.  

    (予之拳拳於此 匪棘其欲 視民利耳 予欲必收成效 宜選可任此事者 

     分遣各道 : 세종 13년 5월 17일)”

 

세종의 지시에 따라 경기, 강원, 함길 각도에는 이온을 보내고 충청, 전라도에는 오치선을 보냈으며 경상도에는 박결을 그리고 평안, 황해도에는 조곤을 보냈다. 김종서와는 달리 도승지 안숭선은 수차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진심인지 아니면 김종서와 늘 대립각을 세우던 터라 그런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한 김종서와는 달리 안숭선은 자기와 김종서가 같이 가서 수차를 직접 실험해 보도록 허락해 주기를 세종에게 요청했다. 세종이 허락하자 80명을 데리고 행궁 근처의 논에 수차를 가지고 관개를 시험했다. 온 종일 작업을 했지만 1무의 땅도 물을 대기 어려웠다. 이번 수차실험은 실패했다. 일단 전국에 파견했던 경차관을 다 소환하고 인력으로 작동하는 수차를 포기했다. 저절로 돌아가는 수차만 남겨 두었다(세종 15년 4월 8일). 세종은 물의 힘으로 저절로 돌아가는 자격수차에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안숭선도 희망이 있다고 격려했다. 서울근교의 땅에 자격수차를 설치하여 계속 시험하도록 하였다(세종 19년 2월 24일).   


II.4 세자(珦,文宗)가 측우기를 발명하다니!

 

세자 이향(1414-1452)은 세종 3년 10월 27일 일곱 살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종은 건강이 악화된 19년 정월부터 사소한 업무는 세자에게 대행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 그렇지만 세종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그 다음해(세종 20년) 5월 27일부터 세자가 일부 업무를 보게 하였으며 세종 21년에는 강무도 세자가 주관하도록 하였다. 세종의 눈병이 심해진 세종 24년(1442) 3월부터는 세자의 섭정을 본격적으로 의논했으며 그 해 5월부터 세자가 본격적으로 정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 국정 최대의 현안 과제는 가뭄이었다. 비가 어디에 얼마가 왔는지가 의정 대신은 물론 세종의 최대 관심거리였다. 각 도 감사는 비가 어디에 어느 정도 왔는지를 일일이 파발로 서울에 치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사의 보고라는 것이 대개 “모월 모일 모시 모처에 비가 와서 땅이 젖었는데 깊이가 얼마였다.”라거나 “비가 와서 강물의 높이가 얼마가 되었다.”는 식의 추상적인 보고여서 구체적으로 강수량을 짐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비에 젖은 땅의 깊이라는 것이 토질에 따라 다른 것이고 비가 와서 강물이 붇는 것도 강마다 다 다른 것이라서 객관적으로 얼마의 비가 왔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측우기가 발명되는 것은 황우(누런 비) 소동이 있을 세종 23년 4월 무렵이 있었다. 이 때 세자는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젖은 땅의 깊이를 재보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정확하게 얼마나 비가 왔는지를 가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작은 구리 그릇에 눈금을 새겨 그것을 궁중 뜰 안에 놓아두고 비가 내리는 양을 측정했다(세종 23년 4월 29일). 이 사실을 알게 된 호조가 길이 2척(약 66cm) 직경 8촌(약 26cm)의 긴 쇠그릇으로 측우기를 만들었다(세종 23년 8월 18일). 그리고 마전교에 강우량을 알리는 게시판을 만들어 알리고 한강변 암석에도 푯말을 세워 강 수위의 정도를 측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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