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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69> 경제개혁이 시급하다 IV. 화폐개혁으로 물가를 잡아보자<下>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4월28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4일 10시2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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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IV.5 주화활성화 10년 계획

 

세종은 주화제도는 공적으로도 유익함이 없고 사적으로도 유익함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세종 8년 2월 28일).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저화보다 나은 주화 사용을 싫어 할 이유가 없는데 사용을 기피하니 밤낮으로 주화를 쓰게 할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모르겠다고 술회했다(세종 9년 10월 12일). 아마 이 정도로 낙심했다면 태종은 주화제도를 즉시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화제도는 백성들에게 편리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법을 못 찾아서 그런 것이지 주화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종은 화매, 즉 국가가 곡식이나 어물 같은 물건을 내다 팔고 주화를 거두어들일 때에는 주화가 잘 유통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주화가 잘 유통되지 않은 것은 화매를 주기적으로 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국가의 창고에는 묵은 쌀이 많다. 매월 백 석씩 민간 시세에 따라

    화매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면 십 년인즉 만 2천 석이다. 십 년쯤 해 보면 민심이 

    좋은지 나쁜지 헤아릴 수 있겠다. 비록 좋은 양책은 아니나 

   주화 사용에 일조는 하게 될 것이다. (今國家倉庫所儲陳穀數多 每月若一百石 依民間時勢 

   不絶和賣十年則 一萬二千石 行之十年 可以觀民情之好惡矣 此雖非良策 亦行錢之一助也 : 세종 9년 10월 12일)” 

 

이 착상에 대해 의정부와 육조가 같이 의논한 결과 모두 좋다고 하여 시행에 들어갔다. 풍저창과 군자감, 내자시, 내섬시, 인순부, 인수부 등 각 사의 묵은 곡식을 매달 1백 석씩 화매하되 한 사람 당 쌀 한 말로 제한하였다(세종 9년 10월 12일). 국가가 매월 백 석씩 묵은 쌀을 내다 팔고 주화를 거둬들이면 당연히 시중 쌀값은 떨어지고 물가와 주화의 가치는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화 물가는 떨어지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시장가격으로 쌀 1되 값은 세종 7년 5월 주화 3문이던 것이 본격적으로 화매가 계속되던 세종 11년 9월에는 주화 12,13문까지 올라갔다. 

 

[동의 부족과 동전퇴장]

 

주화제도는 출범할 때부터 충분한 구리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동전 주조에 필요한 구리는 대부분 시중에서 거둬들였다. 주로 무너진 사원이나 관청 혹은 병기고의 구리기물과 가재도구에서 조달하였다. 모든 백성들도 그 품계에 따라 일정량의 구리를 바쳐야 했고 범죄자의 속죄 벌금도 구리로 내게 했다. 그와 함께 전국적으로 동광을 탐사하고 개발하도록 하였으며 일본으로부터 동을 수입하는 것조차 검토했다. 구리의 공급에 한계가 있자 구리 가격이 상승하여 동전의 명목가치가 동전 구리의 실제가치보다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동전을 녹여 물건을 만들면 상당한 이익을 볼 수 있게 되자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다. 법대로 하자면 이런 사람은 극형에 처해야 한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번 형조의 계를 보니 동전을 녹여 그릇을 만든 최석이 유을부 등을

    모두 극형에 처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今刑曹所啓銷錢鑄器崔石    

    伊 劉乙夫等 竝置極刑乎否 : 세종 14년 9월 4일)”

 

맹사성과 이맹균은 가장 가벼운 죄를 주자고 했고 권진, 허조 등은 몰래 돈을 녹인 사람이 많을 텐데 지금 관대하게 처리하면 징계의 의미가 없을 것이므로 극형에 처하자고 했다. 세종은 극형을 결정했다. 그리고 동전을 녹여 그릇을 만드는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고발자를 포상하며 공범으로서 고발하는 자는 죄를 면해주기로 했다.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장 1백대를 쳤다(세종 14년 11월 10일). 동전을 일본 상인에게 팔아넘기는 행위도 참형에 처하도록 했다(세종 15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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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화의 퇴장]

 

주화는 한편으로는 명목가치가 낮아 일반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장가치가 명목가치 보다 더 높음에 따라 녹여서 다른 그릇이나 기물로 만드는 것이 더 이익이 되었다. 따라서 극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주화는 빠르게 거래에서 퇴장되었다. 총 동전 주조량(2만 7천관) 중에 시중에 약 1/10(2천7백관)이 유통 중인데 이것이 모두 다 녹여진 다음에야 동전을 녹이는 범죄가 줄어들 것 같았다. 동전을 녹이는 범죄를 없애려면 동전의 명목가치가 내재가치보다 더 높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구리함량이 적은 새로운 동전을 만들어 유통하든지 아니면 동전의 시중 공급량을 획기적으로 환수하여 물가를 현저히 낮추어야 했다. 그러나 둘 다 어려웠다. 유통되는 동전의 양도 많지 않았고 동전이 아닌 다른 물품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동전을 환수하여 공급량을 줄인다하더라도 물가가 내려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즉, 환수되는 동전의 거래 매체 역할을 쌀 이외의 다른 물건들이 대신하게 됨으로써 동전 환수가 통화 공급의 감소를 초래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쌀 이외의 물건의 동전으로 표시한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게 됨으로써 동전 환수 정책이 성공적으로 물가를 낮추지 못함과 동시에 동전기피현상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원래 쌀 1되에 동전 1문이라고 하고 동전에 들어있는 구리(1g)의 가치도 1문이었다고 하자(점A). 그러면 구리(1g)은 쌀 1되의 가치가 되는 셈이다. 그 후 물가가 두 배로 상승하여 쌀 1되가 동전 2문이 되고 구리(1g)가격도 두 배로 올랐다고 하면(점B) 구리(1g)과 쌀 1되의 상대가격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동전 1문의 명목가치는 1문이지만 실제 시장가치는 2문이 되는 셈이다(점C). 따라서 동전을 녹이면 100%의 수익률(선분AC)을 올리게 되므로 녹여서 퇴장시키는 유인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쌀값과 구리가격을 절반(동전 1문)으로 내려야 한다(점 A로 돌아감). 그러기 위해서 국고미를 풀어 시중의 동전을 환수하는 경우 동전이 귀해지면서 동전으로 표시한 국고미 가격은 점B에서 점D로 하락할 것이다. 점D에서는 여전히 구리의 실제가치와 동전의 명목가치 사이에 괴리가 있게 되어 동전을 유통하지 않는 것이 유리한 상태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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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 경우 쌀값은 떨어지지만 구리와 다른 물건(예를 들어 포화)의 가격은 떨어질 이유가 없다. 따라서 가격이 떨어지지 않은 포와 같은 물건으로 거래를 하려는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즉, 포화가 동전을 대체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쌀을 공급하여 동전을 환수하고 이를 통해 통화 공급의 감소 및 물가의 하락을 유도하고자 했지만 동전 환수 대신 쌀 이외의 다른 물건들이 통화 역할을 대신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통화 공급의 감소효과가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 된 것이다. 따라서 쌀 이외의 물건의 동전으로 표시한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게 됨으로써 동전 환수 정책이 성공적으로 물가를 낮추지 못함과 동시에 동전 기피 현상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철전 대안과 화폐제도 대토론]

 

주화정책의 실패는 이제 명백해 보였다. 주화에 대한 인기는 떨어지고 물가는 지속적으로 오르며 주화를 녹여 그릇을 만드는 범죄자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주화를 녹이는 것을 막으려면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전을 환수해야 하는데 시중에는 이미 동전이 고갈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전의 역할을 미포(米布)와 같은 다른 물건들이 대체하고 있었으므로 통화조절 정책이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세종은 마지막으로 철전을 생각했다. 철전은 고려시대에 도입되었던 적이 있었다. 

 

   “무쇠는 우리나라에서 나므로 녹여서 밀반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

    철전으로 동전을 대용함이 어떻겠는가. 여럿이 의논해서 보고하라.

    (水鐵 本國之産 且無所鑄出境之弊 鑄鐵錢以代銅錢如何 僉議以啓 

    : 세종 20년 2월 12일)”  

 

황희는 즉시 대답을 했다. 무쇠 생산은 한이 없으므로 녹여서 나가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며 저화같이 용도나 쓸모가 없는데도 잘 사용되었는데 하물며 철전이 잘 통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동전을 모두 거둬들이고 주전소를 만들어 철전을 시행하자고 했다. 세종은 후일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다. 이틀 뒤 다시 화폐제도 문제를 의논했다. 

좌의정으로 은퇴한 맹사성 등은 동전을 폐지하되 철전과 미포를 겸용하자고 했다. 심도원은 무슨 제도이든지 백성들이 원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맹사성 성억 황보인 등은 다시 강조해서 말했다. 동전을 싫어하는 백성들이 철전인들 좋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민심에 순응하여 오승포(오종포)를 다시 화폐수단으로 도입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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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새 철전제도를 실시해보자는 황희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 미포시대로 돌아가자는 하연 같은 자도 있었다. 철전을 쓰되 미포를 같이 쓰자는 사람도 많았다. 철전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신하의 수가 부정적인 사람보다 많기는 했지만 세종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동전의 경우 그렇게 압도적 다수가 지지하고서도 실패했는데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철전안을 포기했다.

 

IV.6 저화로 돌아가자.

 

철전문제가 흐지부지되고 나서 거의 팔 년 뒤 호조는 조심스럽게 주화 대신 저화를 사용할 것을 건의했다. 이때 사실상 주화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거래는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지거나 포화를 사용했을 것이다. 세종은 집현전 직제학 김문과 이계전을 불렀다.

 

   “호조가 주화 사용이 어렵다고 하며 저화를 다시 사용하자고 하니

    옛 제도를 자세히 검토한 뒤 보고하라.

    (戶曹以錢幣難繼 請改用楮貨 其考古制以啓 : 세종 27년 10월 11일)”

 

김돈과 이계전이 옛 제도를 면밀히 고찰한 뒤 올린 보고의 내용은 역사를 보면 주화가 주된 화폐이고 저화는 보조화폐에 불과하므로 주전을 포기할 수가 없으며 한번 법을 세웠으면  쉽게 고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만 포화는 고액거래에 꼭 필요한 것이므로 주화 전용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포화를 같이 겸용하는 것이 옳겠다고 보고했다. 세종은 세자로 하여금 좌의정 등과 함께 화폐제도를 검토하게 하면서 철전의 가능성을 다시 물어보게 했다. 모두들 철전은 곤란하다고 했다. 저화는 너무 강하게 법으로 사용을 강제하지만 않으면 자연스럽게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집현전의 이계전이 저화사용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법이라는 것은 반드시 ‘선갑선경하고 후갑후경하여 영구히 폐단이 없을 것을 깊이 생각하고 계획한 뒤’에 입법해야 된다(國家立法 先甲先庚 後甲後庚 計其永終無弊 然後制之)라고 주장했다. 저화는 여러 가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위조의 폐단이 심할 것이라 지적했다.  주화제도를 유지하자는 요지였다. 그러나 세종은 이미 저화 통용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의정부에서 저화제도 부활에 대한 실천사항을 공표했다.(세종27년 12월 4일)   

 

   (i)  과거 사용하던 저화와 새로 발행된 저화를 같이 사용할 것,

 

   (ii) 동전 50문을 저화 1장으로 정해 쓸 것,

 

   (iii) 태형 10대는 동전 6백문, 저화 12장으로 속전을 거둘것    

 

   (iv) 속전과 각종 조세와 화매는 동전과 저화를 겸용하여 통용할 것,

 

   (v) 녹봉은 저화로 지급하며 모든 관용 지급도 저화로 할 것

 

   (vi) 헌 저화는 2장을 새 저화 1장으로 교환할 것 등 이었다.    

 

그러나 주화를 저화로 교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저화 사용은 부진했다. 주된 원인은 관공서에서 거두는 각종 세금이나 공물을 저화로 받지 않고 동전이나 포화나 잡물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저화를 강제로 통용하게 하는 법을 만들고 싶었지만 신하들 말이 그대로 두면 자연스럽게 저화를 많이 쓸 것이라 해서 가만히 있었으나 저화 사용은 크게 늘지 않았다. 주화와 마찬가지로 물가가 너무 빠르게 올랐고 또 물물교환의 여지가 열려있는 이상 저화 사용은 지지부진 할 수밖에 없었다.

 

[화폐제도 개혁 실패의 원인]

 

저화제도를 채택한 태종의 정치적 의도가 백성들의 거래 편리성 보다는 발권력으로부터 나오는 국가의 이권(利柄)확보에 있었다면 주화제도를 정착시키려고 시도한 세종의 의도는 백성들에게 보다 더 나은 화폐제도를 제공함으로써 유가적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데 있었다. 만약 발권력에서 나오는 국가적 이권을 위해서라면 굳이 부왕의 유업인 저화제도를 버리면서까지 주화제도를 들여올 세종은 아니었다. 당시 저화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저화 가치의하락과 이에 따른 물가상승이었다. 저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모든 재화의 가격이 상승한 것이다. 저화 가치 하락에 따른 물가 상승은 저화로 납부되는 국고의 수입을 크게 위축시켰고 동시에 저화로 급여를 받는 국가 공무원의 실질소득을 떨어뜨릴 것이다. 민간부문에서는 만약 물물교환이 허용된다면 저화를 매개로 한 거래를 피하면서 물가 상승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강제로 저화로 거래를 하면 물건을 파는 자는 물가 상승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저화 표시 가격을 올려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물가 상승과 저화 기피가 꼬리를 물고 악순환처럼 반복되는 것이다. 

 

세종은 저화제도의 이러한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화가 저화의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주화제도를 채택했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였다. 그리고 저화와는 달리 주화는 구리라는 내재가치가 있는 실체였다. 저화보다 내구성도 뛰어나고 위조도 불가능했다. 주화는 저화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우수한 화폐제도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주화가 우수한 제도라고 해서 저절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화와 저화를 병용하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가 주화제도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감을 주어야만 주화제도가 성공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주화제도, 나아가 화폐제도 성공의 핵심 요소를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주화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주화를 매개로 해서 경제거래가 일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주화가치가 안정되어야 했다. 경제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주화에 대한 안정적인 통화수요’가 있어야 했다. 세종의 주화제도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화에 대한 안정적인 통화수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안정적인 주화수요가 형성되지 못한 첫째 이유는 관공서에서 주화거래가 아닌 현물거래를 조장하고 독려했기 때문이었다. 관공서는 물가 상승으로 인한 실질적인 피해를 피하기 위해 현물을 요구했다. 일반 백성의 현물거래는 엄격히 처벌했지만 관가는 처벌 주체였으므로 사실상 불법 현물 거래를 제제할 방도가 없었다. 세종이 주화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꼭 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지방 관서의 불법 현물 거래를 엄단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실패 원인은 미포라는 강력한 경쟁통화가 존재해 있었다는 점이다. 저화와 병용해서는 주화가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미포라는 더 강력한 경쟁통화와 병용해서는 주화가 이기기 어렵다는 점을 알았어야만 했다. 미포가 더 강력한 경쟁 통화인 이유는 물가 상승에 대한 자연방어기능을 갖고 있다는 점과 소액(미화)과 고액(포화)거래에서 주화보다 훨씬 간편하다는 점, 그리고 이미 수백 년 동안 사용되어 그 편리함이 입증된 관습제도라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미포라는 강력한 관습제도를 능가할 장점이 없는 한 저화든 주화든 철전이든 어떤 제도도 성공하기가 쉽지 않음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포의 가장 결정적인 단점은 ‘가치의 저장수단’에 있어서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다시 말해 부를 오래 보관하는 데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부를 축적할 여유와 형편이 되지 못했던 비교적 단순한 농경사회, 주로 쌀을 생산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물건을 소비하는 사회에서는 미포만큼 간편한 ‘거래의 매개수단으로서의 화폐제도’는 따로 없을 것이다. 주화제도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세종이 했어야만 하는 조치는 ‘거래수단으로서의 주화’의 편리성을 높이는 일이었다. 액면 단위를 더욱 다양화해서 쌀을 대체하는 아주 낮은 저액전과 포화를 대체하는 고액전을 동시에 발행했어야 했다. 포화를 대체하기 위하여 포화를 엄금하도록 하고 저액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일정기간 소액전을 빌려주는 제도를 도입했어야 했다. 그리하여 동전이 쌀과 포보다 더 편리한 화폐가 되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그리고 충분히 주화가 시중에 공급되었어야 했다. 그래야만 물가가 상승하면 주화를 거두어들여 물가조정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물가가 앙등하면 주화의 구리함량을 낮추어 제조하여 동전이 퇴장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미포에 대한 주화의 상대적인 강점은 부의 축적 수단이라는 점이다. 부가 오래 축적된 성숙한 사회라면 ‘거래의 매개수단’이 아니라 ‘가치의 저장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이 더욱 중요해지고 따라서 주화나 철전의 성공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이 모든 점에서 볼 때 세종 대에 주화제도가 정착하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던 것 같다. 주화제도가 이른 만큼 세종은 앞서 나간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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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4월28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4일 10시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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