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20 : 북제 창업자 고환의 업적을 다 까먹은 아들 고담과 손자 고위 <G>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4월28일 16시50분
  • 최종수정 2023년04월03일 11시0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43> 황음한 고환의 세자 고징(AD535)

 

고환의 아들 세자 고징이 아버지의 첩과 정을 통한 것이 발각되었다. 한 명의 비녀가 그 사실을 고발하고 다른 두 명의 비녀가 입증하여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고환은 고징에게 장 100대를 친 다음 유폐시켰고 고징의 모후인 누씨(누소군) 또한 금족령을 내려 못 만나게 하였다. 고환은 고징 대신 이주영의 딸을 총애하여 그에게 얻은 고유를 세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고징은 상서좌복야 사마자여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사마자여는 고환에게 들어가 누소군을 뵙게 부탁하였다. 고환이 이유를 묻자 자신의 경우를 들면서 말했다.  

 

  ” 제 아들놈 사마소난이 제 첩과 통정을 했습니다만

    이것은 바로 덮을 수가 있는 일 아닙니까.

    누비께서는 왕과 머리카락을 매고 부인이 되셨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서 왕을 돕고 

    또 왕께서 장형을 받아 껍질이 다 벗겨졌을 때

    왕비께서 밤낮으로 보살피지 않으셨습니까.

    병주로 도주할 때에도 말똥으로 불을 지피며 고락을 같이 하셨습니다.

    부부가 서로 마땅한 일을 하니 하늘이 도와서

    딸들은 지존의 배필이 되었고 

    아들은 대업을 계승한 것 아닙니까.

    게다가 누비의 동생 누영군의 무공은 어떻습니까.

    왕의 첩(고징과 통정한 정씨)이야 풀과 같이 여기시면 될 것인데다

    비첩들의 말이야 꼭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까?“

 

고환은 사마자여에게 사건을 다시 국문하게 하였다. 사마자여는 통정을 증언한 두 비녀에게는 협박으로 잘못 들은 것으로 말을 뒤집게 하고 고발한 비녀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한 다음 고징을 불러서 왜 거짓말을 하는가를 크게 꾸짖고 고환에게 모든 것은 거짓이었음으로 보고하였다. 고환은 기쁜 마음으로 고징과 누비를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 우리 부자관계와 부부관계를 바로잡은 것은  

    오로지 사마자여다! “

 

황금 130근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44> 고환의 아들 고양(AD535)

 

고환에게는 고징, 고양, 고연, 고육, 고심, 고제 등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재능을 살펴보기 위해 어렵게 꼬인 실타래를 주면서 풀라고 했다. 다들 끙끙거리며 실타래를 풀고 있는 동안에 고양은 칼로 실타래를 한 번에 베어버렸다. 

 

  ” 어지러운 것은 베어버려야 풀리는 법입니다.“ 

 

또 여러 아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고서 도독 팽락에게 그들을 치라고 명령하자 아들들이 다들 무서워서 도망갔지만 고양만은 무리를 거느리고 팽락과 맞붙어 싸우려고 대들었다. 팽락이 투구를 벗고 사과했지만 고양은 그를 사로잡아 바쳤다. 고양은 안으로는 매우 명철하고 결단성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서 형제 친척들이 다들 조롱하였지만 고환만은 그의 재능을 꿰뚫고서 말했다. 

 

  ” 이 아이의 지식과 생각은 나를 뛰어넘을 것이다.“ 

 

 

<45> 고환의 명참모 진원강과 조언심(AD536) 

 

동위 사마자여와 고계석이 손건과 함께 술을 먹다가 고환의 심복 손건이 과음으로 죽었다. 사마자여가 머리를 조아리고 죽을죄를 졌다고 사죄하자 고환은 손건을 대신할 사람을 추천하라고 지시했다. 사마자여는 중서랑 위수를 추천하였으나 고환이 내키지 않아서 고계식에게 물었다. 

 

  ” 위수의 일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대가 늘 근엄하고 정밀하다고 칭찬하던 사람이 누구요?“

 

고계식은 사도부의 기실 진원강이라고 대답했다.

 

  ” 어둠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으며 민첩한 사람입니다.“   

 

한 번 불러 본 고환은 즉시 대승상부 공조로 임명하였다. 군국에 관한 업무를 진원강에게 물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고환이 말을 타고 지나가면서 90여 가지를 지시했는데 진원강은 모조리 기억해 내는 재주가 있었다. 공조인 조언심도 같이 기밀을 다루었는데 이 둘을 합하여 ‘진조‘라고 불렀다. 그러나 진원강의 성품이 부드럽고 근엄하여 고환이 매우 총애하고 가까이 하였다.  

 

 

<46> 하발승의 서위 귀환(AD536)

 

양나라의 황제 소연은 투항한 하발승 등 여러 사람들을 크게 우대하였다. 하발승이 고환을 토벌하자고 건의했지만 소연은 거절했었다. 하발승이 본국 서위로 돌아가려했다. 소연이 주이의 말을 잘 들으므로 하발승은 주이와 깊이 사귀어서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는 허가를 받아냈다. 소연은 멀리까지 나와 그들을 환송하였다.

 

장안으로 돌아온 하발승은 황제에게 사죄하니 주군이 손을 붙잡고 흐느껴 울면서 말했다.

 

  ” 승여가 방랑한 것은    

    짐의 잘못이지 경의 잘못이 아니오.“

 

우문태가 양나라에서 하발승과 같이 돌아온 노유를 천거하여 종사중랑, 후경을 겸상서우복야 남도행대로 임명했다.  

 

 

<47> 동위와 서위의 전투 : 제1차 동서위 전쟁(AD537년 1월)

 

고환은 먼저 양나라와 화친을 구축하여 배후걱정을 덜도록 한 다음 고오조를 상락(섬서성 상주시), 두태를 동관으로 보냈다. 자신은 포판(산서성 영제)에 진을 쳤다. 우문태는 광양(섬서성 임동, 장안 동쪽)에 진을 쳤다. 우문태가 제장을 모아놓고 말했다.

 

  ” 고환의 전략은 우리를 삼면으로 묶어 둔 다음에 

    두태가 동관방면으로 강을 건너는 전략이요. 

    선봉 두태군은 강병이지만 연전 승리하여 교만에 빠져 있소.

    지금 저들을 깨부수면 고환의 나머지는 그대로 무너질 것이오.“ 

 

 

8525217e3eedf1915b4de5b6dd91af74_1679801 

 

제장들이 걱정하며 말했다.

 

  ” 고환이나 고오조는 가까이 있는데

    멀리 있는 두태를 공격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곤란합니다.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문태가 자신 있게 말했다.

 

  ” 고환이 공격한다고 한들 우리는 두태를 격파한 뒤 

    패상(장안시 동쪽 패하부근)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패상으로 돌아 온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므로

    그 틈을 타서 습격하면 반드시 이긴다. 무엇을 걱정하는가.

    5일 안으로 내가 두태를 잡는 것은 확실하다.“ 

 

좌승 소작이나 중병참군 달해무나 친척 조카 우문심도 같은 생각이었다. 

 

우문태는 군사를 출동하여 두태를 공격했다. 두태는 갑자기 군사가 도착하였다는 소식에 군사를 몰아 강을 건너다가 우문태의 습격을 받고 대패했다. 두태도 자살했다. 고환은 군사를 몰아서 퇴각했다. 고오조는 큰 부상을 입으면서도 상락을 함락시켰지만 고환이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부상한 몸을 이끌고 업으로 돌아왔다.    

 

 

<48> 독고신과 양충의 서위 귀환(AD537)

 

독고신(내몽고 출신이므로 흉노계통이거나 선비계통)과 양충은 북위의 하발승 밑에 있던 장수였다. AD534년 황제 원수가 낙양에서 장안으로 몽진 갈 때 단기로 황제를 보필하여 황제를 놀라게 한 사람이다. 하발승 밑에서 형주자사 및 도독삼형주제군사로 형주지역을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동위의 고오조와 후경이 대대적으로 밀려오자 형주를 버리고 양나라로 피신했었다.(AD534년 12월) 독고신은 양나라 황제 소연에게 북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황제가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묻자 부모님이 산동지방(동위 영역)에 있지만 그래도 신하가 주군을 배반할 수 없다고 장안(서위)으로 가겠다고 했다.  

 

  ”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부모를 핑계로 

    두 주군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의롭게 여기고 예의로 후대하여 보냈다. 서위조정에서는 돌아온 독고신에게 삼형을 토벌한 공로를 인정하여 표기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시중 개부의동삼사를 내렸다. 우문태는 양충의 뛰어난 무공을 아껴서 자신의 장하에 남겨두었다. 양충은 수나라 창업자 양견의 아버지다. 

 

 

<49> 동위와 서위의 전투 : 제2차 동서위 전쟁(AD537년 윤9-11월)

 

연초 서위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고환은 AD537년 겨울 20만 대군으로 호구(산서성 길현)로부터 포진(영제)로 직진 남하해 내려왔다. 당시 1만 군사로 항농(삼문협)에 있던 우문태는 일단 관중으로 군사를 물렸다. 고오조는 3만 군사로 하남(낙양 서쪽)을 출발하여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나왔다. 그리고 우문태가 떠난 삼문협을 포위했다. 

 

고환의 우장사 설숙은 서위가 가뭄으로 피폐해 있으니 가만 놔둬도 무너질 것이므로 서둘러 황하를 건널 필요가 없다고 했다. 후경 또한 군사를 앞뒤로 나누어 천천히 진군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지난 번 패배를 급히 설욕하고 싶은 고환은 황황히 포진(영제)을 건너 장안 동북쪽 풍익성까지 다가갔지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낙수를 건너 허원(대려 남쪽)에 진을 쳤다. 서위의 장수들은 겁을 먹고 싸움을 걸기보다는 수비에 치중하자고 건의했다. 

 

우문태는 장안까지 들어오면 민심이 크게 흔들릴 것이고, 그들이 먼 곳을 서둘러 왔으니 분명히 피로에 지쳤을 것이므로 선수를 칠만하다고 판단했다. 군사를 이끌고 사원(대려)부근까지 접근했다. 고환의 군대와는 60여리 거리였다.  다들 공포에 질려있었지만 우문태 조카 우문심은 경축하는 분위기였다. 우문태가 그 이유를 묻자, 출병을 별로 원하지 않는 적들이 너무 깊이 들어왔고, 고환이 지난번 패배에 대해 분개심으로 평정심을 잃고 있으니 한 번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우문태는 달해무를 몰래 적진 안으로 들여보내 상황을 염탐하게 했다. 

 

고환은 우문태의 군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앞으로 나갔다.(10월 2일) 우문태는 이필의 권고에 따라 싸우기가 편한 동쪽 10여리의 위곡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위수를 등지고 동서로 대열을 만든 다음 오른쪽은 이필, 왼쪽은 조귀에게 맡겼다. 이들은 강가 갈대숲에 매복하고 동위군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동위의 장수 곡률강거는 서위의 매복 작전을 알아차리고 우문태와 붙지 말고 정예군을 나누어 먼저 장안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고환은 듣지 않고 갈대숲을 태우는 작전을 펼치자고 했다. 곡률강거는 우문태를 사로잡아야 사람들이 믿을 것이므로 화공은 적절치 않다고 반대했다. 고환은 숫자상의 우위를 믿고 강공하기로 결정했다. 

 

동위군이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밀려들자 숨어서 기다리던 서위군은 북소리에 때를 맞추어 분발하여 동위군대를 둘로 가른 다음에 서위 좌우군이 협공하여 대파했다. 이 전쟁을 하곡(河曲)의 전투라고 부른다. 곡률금이 고환에게 후퇴하자고 했지만 고환은 말안장에 앉아 꼼짝 않고 서있었다. 곡률금이 채찍을 들어 고환의 말을 후려치자 말이 움직였으며 밤을 타고 황하를 다시 건너 돌아갔다. 동위군은 8만을 잃었고 무기와 갑옷 18만 점을 버리고 도망갔다. 우문태는 주국대장군을 덧붙여 주었고 승리한 장수 12명에게 작위와 식읍을 늘려주었다.    

 

동위의 장수 후경이 고환에게 2만을 요구하여 승리에 도취된 우문태를 치겠다고 했으나 고환은 우문태를 잡았다 하더라도 후경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부인 누비의 말을 듣고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고오조도 포위했던 항농을 풀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하곡의 전투를 승리한 서위는 독고신에게 2만을 주어 낙양을 점령하게 하고 낙주자사 이현으로 하여금 형주(하남 등주)와 동형주(하남 필양) 방면을 확보하게 했으며 하발승과 이필은 황하를 지키는 보루인 포판을 확보하게 했다. 동진주(포판) 자사 설숭례는 도망가고 그 집안동생 설선주도하여 서위에 항복하였고 영주(하남성 장갈)자사 전흘은 부하 하약통에게 붙잡혀 서위에 인계되었다. 고환이 요웅 등을 보내 영주를 찾고자 했지만 우문태는 대도독 우문귀를 보내 요웅을 격퇴하였다. 이로써 서위의 영토는 낙양과 남양을 잇는 황하 이남지역을 모두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계속)

<ifsPOST>

 

 

 

1
  • 기사입력 2023년04월28일 16시50분
  • 최종수정 2023년04월03일 11시06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