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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35> 사면권이 제왕의 권한이거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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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1월04일 16시41분
  • 최종수정 2023년09월12일 11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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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갑신에 창덕궁에서 즉위하며 …(중략)… 나라를 이어받는 처음이니 마땅히 대사(大赦)하는 은혜를 베풀어야겠기에 이날 새벽 이전의 모반(謀反)·대역(大逆)·모반(謀叛)죄, 자식이나 손자가 조부모·부모를 죽이려고 꾀하거나 때리거나 욕한 죄, 처나 첩이 지아비를 죽이려 한 죄, 노비가 죽인을 죽이려 한 죄, 독약을 쓰거나 요망한 방술로 인명을 상해한 죄, 강도범(强盜犯) 외의 죄는 발각되었든 안 되었든, 판결되었든 안 되었든 다 용서하며….”(연산군 즉위 교서)


“정부는 2020년 신년을 앞두고, 2019년 12월 31일 자로 일반형사범, 양심적 병역거부 사범, 특별 배려 수형자, 선거사범 등 5147명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한다. 아울러 운전면허, 취소·정지·벌점, 생계형 어업인의 어업면허 취소·정지 등 행정제재 대상자 총 171만2422명에 대한 특별감면 조치를 함께 시행한다.” (문재인 대통령 신년 특별사면)


 여의도 사람들이 늘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게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 때는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툭하면 나오는데, 계기도 청와대 이전, 공공기업 인사, 87년 체재 종식, 개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나는… 이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사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없애고 의원내각제를 한다 해도 수상이 권력을 제왕처럼 쓰면 무슨 소용인가. 제왕적 대통령은 안 되고, 제왕적 수상은 괜찮은가? 그래서 요즘 윤석열 당선인(출판 때는 대통령일 것이다)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라고 할 때마다 좀 불안하다. 혹시나 ‘몸통’은 놔두고 ‘잔재’만 청산하시려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역대 대통령들 모두 스스로는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제도 탓에 어쩔 수 없이 권력이 남용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현재의 제도만 활용해도 제왕적인 대통령은 나올 수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입법부는 대통령을 포함한 행정부를 견제하라고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입법부의 절반 이상이 넘는 국회의원들이 언제나 여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자진해서 대통령의 뜻을 수행하는 선봉대가 된다. 여당 국회의원들이 국무위원 인사청문회에 들어와서 하는 일은 야당의 공격을 방어해주는 것이다. 대통령이 공격받으면 마치 자기 부모가 욕을 먹은 것처럼 길길이 날뛴다. 국무총리에게는 국무위원 제청권, 해임건의권, 국정 행위 문서 부서권 등 대통령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 권한을 제대로 사용한 총리를 본 적이 있나? 어디서 갑자기 제왕적 대통령이 나타난 게 아니다. 자신들의 출세와 이득을 위해 스스로 충견이 되고, 권력에 대한 감시에 눈을 감은 결과로 제왕 같은 대통령이 만들어진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싶다면… 대통령이 스스로 사면권부터 버려야 한다. 사면권 자체가 이미 군주가 은전을 베풀던 왕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 정한 형량을 법 위의 초월적 존재가 탕감해주는 것. 이것보다 더 제왕적인 행위가 어디 있나.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이라고 강변하지 말자. 애초에 왕정 시대 관습이 이어져서 그런 권한을 갖게 된 것뿐이니까. 시대에 안 맞으면 헌법도 바뀌는 것이다.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로 개헌해야 한다는 말은 잘하면서 사면권을 빼자는 말은 왜 하면 안 되나. 특히 특정인만 콕 짚어 빼주는 특별사면은, 정말로 대통령이 왕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행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종료 한 달 전인 2013년 1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특별 사면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12월 정치자금법 위반 사범인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를 특별 사면해 이듬해 국회의원에 출마할 수 있게 해줬다. 범죄의 종류를 정해 일괄 사면하는 일반 사면은 국회 동의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특별사면은 이런 절차도 없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측근들을 풀어주기 위해 특별 사면권을 활용했다. 그리고 늘 ‘국민통합’이라고 둘러댔다. 


 2021년 1월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당 대표가 “적당한 시점이 오면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건의하겠다”라고 했다가 엄청난 후폭풍에 휘말린 적이 있다. 일반 국민 중에도 이낙연 대표의 말에 분개한 사람이 많았는데, 이유는 “그럴 거면 왜 잡아넣었느냐”는 것이었다. 죄를 지으면 지은 만큼 벌을 받는 것. 이것이 공정의 기본이다. 내 죄를 사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입 속의 조청처럼 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면죄’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굉장히 오만한 용어다. 도대체 누가 누구의 죄를 사해준다는 말인가. 면죄부가 횡횡했던 중세의 또 다른 이름은 암흑시대였다.


 사면권은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 뿐만 아니라 법치의 근간도 뒤흔든다. 당 태종은 “사면의 은혜는 오직 법을 지키지 않는 무도한 무리에게만 미친다. 1년에 두 번 사면령을 내리면 좋은 사람이 벙어리가 된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면은 소인의 다행, 군자의 불행”이라고도 했다. 사면이 잦으면 반성하는 대신 사면 날만 기다리게 되니, 악행 하는 풍속이 사라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스운 것은, 정작 그 무소불위의 임금님들조차도 사면을 행사할 때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행사에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러면서도 늘 “과인이 부덕하여”라는 전제를 달고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현대의 ‘제왕’들은 같은 헌법 11조에 나오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을 받지 않는다. (1항)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떤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2항)’을 위반해 사면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크다”라고 한다. 제정신이 아니다. 

 

<ifsPOST>​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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