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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의 문화시평 <17> 예술적 표현의 자유: 팔 길이 원칙: 블랙리스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10월02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10월11일 10시10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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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언론의 가장 큰 관심 사항 중 하나는 블랙리스트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후보자는 인터뷰에서 다시는 그런 사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적인 소신을 밝히면서, 임명된다면 그 문제를 소상히 살피겠노라고 했다. 블랙리스트 문제는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에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정부 정책에 반하는 문화예술인과 단체에 대한 지원금을 차단하기 위한 리스트를 작성하여 시행함으로써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 표현의 자유와 지원의 공정성에 크게 반하는 처사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그 정책 결정 및 시행 과정 규명을 위한 조사와 감사는 물론 정권의 도덕성으로까지 비화하는 격랑이 일었다. 차기 정부에 들어서는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 등으로 긴 시간 동안 많은 관계자들이 곤욕을 치루고 현재까지도 그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블랙리스트는 절대로 존재해선 안 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실제 명문화된 리스트는 없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리스트는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을 대놓고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모종의 수혜를 주려는 정부는 아마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예술 특히 예술에 있어 표현의 자유가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받는다면 예술은 정권의 시녀로 전락할 수 있고, 창의성과 자유를 특질로 하는 예술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문화예술 지원정책의 원칙 중 하나로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이해되면서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정부로부터의 독립성과 자율성의 근거로 삼아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블랙리스트의 문제는 정책적 원칙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였음이 틀림없다.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는 이 원칙을 강화하면서 정부의 간섭을 완전히 차단하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문예위는 여전히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방증하는 것이고, 이러한 간섭 차단의 태도는 ‘팔 길이 원칙’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처사라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팔 길이 원칙”은 1945년 이후 시행된 영국 정부의 공공 지원 제도의 원칙 중 하나로서, 그 기본은 무조건적으로 정부의 간섭을 폐지하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주로 정부 자금이나 지원이 사용되는 목적에 대한 투명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원칙이다. 이 원칙은 정부 자금 사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정부의 자금 사용에 대한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조한다. 영국의 경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역할을 담당하는 ACE(Art Council England)의 위원장은 임기 중 정부와 ACE 예산 및 운영 전반에 관한 계약을 맺고 그 계약 내용 안에서 자율권을 가지고 기관을 운영한다. 이 계약 내용에는 지원금이 사용되는 목적, 지원의 수혜자와 그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고려를 통한 자금 사용의 사회적 영향, 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목표 달성을 위한 자금의 효율적 사용 방법, 지불 방법과 절차와 기준, 지원 규모와 범위, 부적절한 사용이나 오용방지책, 지원 결정의 전문성, 성과에 관한 공개 등 투명성,공정성 및 공공성 등에 관한 세세한 원칙들이 정해져 있다.

 

  따라서 ‘팔 길이 원칙’은 공공 자금 사용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정부 지원이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로 활용된다. 이 원칙은 정부와 관련된 각종 프로그램 및 프로젝트에 적용되며, 공공 자금 사용에 대한 감독 및 평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원칙은 정부의 자금 사용이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도록 하고, 부정부패와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팔 길이 원칙’은 정부의 지원에 있어 가능한 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만, 때로 표현의 자유와 제도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예술은 속성상 정부의 정책에 반하거나 국가나 국민의 삶에 도전이나 위해를 가하는 상황을 초래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예술의 실험성과 진보적 속성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론 예술의 정치적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예술과 정치 간의 상호작용은 시대, 문화, 예술가 및 정치적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 일부 예술가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예술 작품을 통해 전달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러한 작품은 종종 사회 문제, 인권 문제, 정치적 이슈 등과 관련되며, 예술을 통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은 민주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임으로 예술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가진다. 이는 어떤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더라도 예술가들이 다양한 시각과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특정한 정치나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위한 노골적인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예술이 이용된다면 문제는 다르다. 이러한 문제는 예술의 자율적 시스템 내에서 걸러져야 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예술활동이 사회 일반의 가치와 상충되는 경우는 어찌할까? 대표적인 것으로 1980년대 말 미국에서 일어났던 사례를 들 수 있다. 미국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의 지원사업이었던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의 전시인 《완벽한 순간》이 정치적 논란으로 지원이 취소되었고, 십자가 이미지를 제작한 사진 작가 안드레스 세라노(Andres Serrano)의 작품 <Piss Christ>에 대한 기부금 지원에 대한 논쟁으로 지원이 취소된 경우가 그것이다. 전자는 사진 작품의 일부가 마조히즘적 내용을 담고 있었고 후자는 소변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 사진이었다. 이 일로 인해 의회에서는 예술을 어디까지 지원할 것인가의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후 1970년대 NEA의 지원 프로그램과 관련된 정부의 정책과 충돌이 있었고, 이러한 논쟁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더욱 고조되었다.

 

  특정 정파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거나 종교적 혐오감 또는 사회 일반의 건전한 미풍양속을 심대하게 해치는 내용의 예술 작품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예술적 표현의 자유, 팔 길이 원칙, 블랙리스트 등의 문제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부의 예술지원 정책에 있어 표현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팔 길이 원칙 역시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해 필수적인 원칙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요소는 무조건적 자유와 자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제한된 자원의 효율성과 공정성,공공성의 측면에서 우선순위와 일정 부분의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 블랙리스트는 저급한 문화행정의 상징이다. 최고의 예술을 창작하고 향유하기 위한 표현의 자유는 제약받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정부의 지원을 받는 창작이나 발표의 경우 제도적 시스템 안에서 예술계와 사회의 충분한 논의를 통해 자정적으로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블랙리스트 사태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지원사업을 수행하면서 그 예술적 가치와 수준, 내용을 탁월하게 엄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전문화함은 물론 시민들의 자유로운 비판 정신을 고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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